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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릉 가볼만한 곳 율곡이이가 태어난 고즈넉한 오죽헌
    ▷ 국내여행/□ 강원도곳곳 2021. 11. 14.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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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KCD1ILk8kNY

    오랜만에 강릉에 갔다.
    여행차원은 아니지만 아침부터 강릉 오죽헌 앞에 오니 뭔가 멀리 놀러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릉시 관광안내도를 슬쩍 보고 입구 쪽 매표소로 가봤다.

    아침부터 굉장히 쌀쌀한 날이었지만, 하늘이 정말 맑아서 사진찍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오죽헌 입구 오른쪽으로는 매표소와 문화관광해설 안내소가 있었고 가운데 커다랗게 오죽헌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리 사진으로 찾아본 것보다 훨씬 멋져 보였다.
    날씨가 좋아서 그랬나?


    매표안내
    어른 3,000원
    청소년/군인 2,000원
    초등학생 1,000원


    강릉시민, 경로, 장애인, 미취학아동, 국가유공자는 신분증을 지참하면 무료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어른 2인 입장료를 구매해서 오죽헌 입구로 들어가 봤다.

    넓은 길을 따라 가니 벌써부터 고즈넉한 분위기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입구에서 들어오자마자 오른쪽에 시립박물관과 함께 관리사무소가 있었는데, 물품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조금 더 걸으니 오른쪽에 바로 율곡이이 동상이 보였다.
    율곡이이 라고 한글로 적혀 있었고, 표정과 자세가 섬세해서 한참을 보게 되었다.


    견득시의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율곡은 1536년 음력 12월 26일에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용 꿈을 꾼 후에 오죽헌 몽룡실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584년 정월 16일에 서울 대사동에서 향년 49세로 별세하였다.
    천자가 영오하여 어린 나이인 8세에 화석정 시와 10세에 지은 경포대부는 길이 세상 사람의 찬탄을 받은 글이고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으로 올라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다.
    29세 8월에 명경과에 장원급제하여 양관 대제학과 여러 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고 사후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율곡은 벼슬길에 있으면서 문, 사, 철의 수많은 저술을 남겨 한국 유학의 거벽으로 칭송 받고 있다.
    특히 성리학에서는 독창적 견해로 이기설을 진일보시켰고 나라와 민생을 걱정한 현실의식에 투철하여 개혁의지를 구현하려고 힘썼으며 그 유명한 10만양병론도 이러한 의지의 표상이다.

    율곡이이 동상 뒤쪽으로 걸어가면 초충도 화단이 나온다.
    초충도화단 주위로 연못과 청풍당, 구용정, 구사정, 매화동산이 위치해 있고, 오죽헌 숲길도 조성되어 있었다.
    검은 대나무 숲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총길이 510m로 약 30분 정도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코스라고 한다.

    구용정으로 가니 파란하늘과 뒤로 보이는 검은 대나무 숲이 잘 어우러져서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구용정은 율곡이의 저서 <격몽요결>의 ‘지신장’에 나오는 <학문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아홉가지 몸가짐>, 즉 '구용'에서 따온 이름이다.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율곡이이가 42세에 쓴 책이다.

    마음을 세우는 일, 몸소 실천하는 일, 부모 섬기는 법, 남을 대하는 방법 등 학문하는 방향을 제시해준다.
    입지장(뜻을 세움), 혁구습장(낡고 나쁜 습관을 고침), 지신장(배우는 사람의 자세), 독서장(글을 읽는 방법), 사친장(부모를 섬기는 일), 상제장(장례의 절차와 법도), 제례장(제사의 절차와 예절), 거가장(가정생활에 관한 글), 접인장(대인관계에 대한 예절), 처세장(처세에 관한 지침) 등 전체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용정 바로 옆에는 초충도 화단이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고 현숙한 여성 중 한명인 사임당은 시, 글씨, 그림, 자수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림으로는 산수와 포도를 잘 그렸으며, 풀과 벌레 역시 잘 그렸다.
    특히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에서는 자연을 허투로 보지 않았던 사임당의 심성과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해 내는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오죽헌에서는 초충도의 주요 소재인 오이, 수박, 가지, 맨드라미, 봉선화, 양귀비, 원추리 등을 심어 화단을 조성하였다

    설명에서처럼 여러가지 주요 소재로 화단을 조성했는데, 지금은 추운 가을이라 그런지 화단이 비어 있었다.
    봄 여름에 온다면 조금 더 풍성한 화단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구용정 뒤쪽의 오죽헌 숲길 쪽으로 걸어가봤다.
    길게 뻗은 오죽들이 양 쪽으로 멋지게 서있었는데, 안쪽으로 보이는 나무계단과도 잘 어울려서 너무 아름다웠다.
    하늘까자 맑고 파래서 이 공간이 더 멋스러워 보였다.

    검은색 대나무가 이렇게 신기할 줄이야.
    한참을 둘러보다 숲길을 나왔다.
    나중에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오죽헌 숲길을 다 둘러봐야겠다.

    반대쪽으로 나오는 길에 초충도 화단 표지판을 발견했다.
    이쪽이 입구였나?

    길을 따라 들어가니 넓은 광장이 나왔다.
    표지판도 잘 되어있었는데, 신사임당 동상과 시립박물과, 율곡인성교육관도 이쪽에 있다고 한다.
    세계최초 모자 화폐인물 탄생지라는 말이 왠지 멋있어 보였다.
    신사임당과 율곡이이.
    오만원권과 오천원권.

    넓은 광장에서 바로 보이는 이 문이 바로 자경문이다.

    수수한 듯한 단청의 컬러감이 많이 화려하지 않아서 더 멋있었다.
    확실히 지붕과 단청과 무늬에서 옅볼 수 있는 곡선미와 색채미가 인상깊었다.

    자경문은 오죽헌의 안팎을 가르는 문이다.
    율곡은 어머니를 여읜 후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유학에 뜻을 두고 일 년 만에 돌아왔다. 그때 강릉 외가로 와 외할머니 앞에서 '스스로 경계하는 글'이라는 <자경문>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자경문으로 들어가자 또 커다란 광장이 하나 나왔다.
    광장 바닥의 색깔이 벽돌 색이었는데, 왠지 오죽헌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는 컬러라 사진을 찍어도 다 예쁘게 나왔다.
    평일이었지만, 날씨가 좋아서인지 오죽헌을 방문한 사람들도 꽤나 많았고, 외국인들도 몇몇 보였다.

    우와 컬러감 대박 :)

    이제 오죽헌과 문성사를 볼 수 있는 문으로 올라가보자.

    작은 문을 지나면 왼쪽에는 오죽헌, 정면에는 문성사가 자리하고 있다.
    하얀색을 띄고 있는 오죽헌의 건물이 수수하지만 고풍스러움을 띄고 있는 느낌이었다.

    문성사는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인조 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성사 단청 옆으로 멋스럽게 뻗어있는 나무는 율곡송이라고 한다.

    문성사 우측에 있는 율곡송은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군자 식물로 곧은 덕과 굳센 절개에 대하여 옛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겨 할 줄 몰라서 되겠는가”
    율곡 이이 「소나무 예찬」

    그리고 여기가 바로 오죽헌이다.
    오죽헌 현판과 함께 오른쪽 방에는 몽룡실 현판도 붙어 있었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별당 건물로, 당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양식에서 익공양식으로 변해 가는 건축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난 집으로 조선 중종 때 건축되었다.
    한국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왼쪽 마루방은 율곡이 여섯 살 때까지 공부하던 곳이며, 오른쪽 온돌방은 1536년 신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곳이다.
    몽룡실이라고 부르는 온돌방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오죽헌의 왼쪽에는 율곡매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신사임당과 율곡이이가 직접 가꾸었던 나무라고 한다.
    꽃색깔이 연분색인 홍매 종류라고 하는데, 꽃 필 시기에는 얼마나 예쁠지 궁금하다.

    낮은 돌담까지도 이 공간의 고즈넉함을 더해주었다.

    오죽허 뒤쪽으로 가면 이제 안채와 바깥채가 나오는데, 가는 길에 오른쪽으로 오죽이 보였다.
    대나무가 정말 검은 색을 띄고 있었고, 이파리들이 푸르른데 햇빛까지 받아서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특히 바람이 불때 대나무 숲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 신기했다.
    약간 드론이 나는 것 같은 소리랄까?

    뒤쪽 문을 통과해 안채와 바깥채 쪽으로 가봤다.
    뒤쪽에 위치한 건물이 안채였는데, 굴뚝과 아궁이가 눈에 띄었다.
    벽에 그을린 자국까지 남아있어서 최근까지도 왠지 사용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별당)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가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곳이고, 안채 안에는 서예 작품이 많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안채 왼쪽으로는 가마솥과 아궁이가 위치한 부엌이 있었다.
    부엌이 꽤나 넓었고 내부로는 출입금지였지만, 슬쩍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아궁이는 바깥채 건물에 위치한 아궁이와 가마솥이었다.
    햇살이 아주 잘 들어온다.

    바깥채는 주로 남자들의 생활공간이다.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율곡이이의 외할아버지 신명화, 아버지 이원수, 이종사촌 권처균이 거처했다.
    기둥의 시문은 조선 정조 때 명필 추사 김정희의 필적을 판각한 것으로 명나라 진계유의 암서유사에 나오는 시구이다.
    기둥마다 연결하여 시구를 걸었다는 뜻으로 '주련'이라고 한다.

    바깥채 왼쪽으로는 어제각으로 갈 수 있는 운한문이 위치해 있다.
    운한문은 막돌담장으로 둘러싸인 어제각을 드나드는 출입문이라고 한다.
    어제각과 함께 정조 12년(1788) 지금의 문성사 앞에 건립되었다가, 1987년 이 자리로 돌아와 복원되었다고 한다.

    운한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변으로 멋진 소나무들이 높게 뻗어 있어서 눈에 확 띄었다.
    소나무 키가 너무 커서 올려다 볼수록 신기했다.
    그리고 작은 소나무도 자라고 있었는데, 작은 소나무는 너무 귀여웠다.

    그리고 안쪽 계단 위로어제각이 보였다.
    어제각 지붕 위에 소나무 이파리 들이 쌓여 있는 모습이 너무 포근하게 느껴졌다.

    어제각은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과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었다.
    1788년 정조 임금은 벼루와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들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보았다. 그리고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지어 새기게 하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붙여 잘 보관하라며 돌려보냈다. 당시 임금의 어명을 받은 강원도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집이 어제각이다.

    어제각까지 다 둘러보고 다시 커다란 광장으로 내려왔다.
    햇살이 강렬한 날이었는데 구름이 꽤나 빨리 지나가는 날이라 구름 그림자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죽헌의 남문인 입지문을 지나 내려왔다.

    입지문은 오죽헌의 남문으로 『격몽요결』의 첫 장인 「입지장」에서 따온 이름이다. 『격몽요결』은 율곡이 42세(1577)때 해주석담에서 저술한 책으로 초학자들에게 학문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유학의 입문서이다. 책의 이름은 몽매함을 물리치는 요긴한 비결이라는 뜻이다. 율곡은 「입지장」에서 "처음 학문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맨 먼저 뜻부터 세워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도 성인이 되리라고 마음먹어야 한다."라고 했다. 학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뜻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문은 다 비슷한 듯 하지만, 조금씩 크기도 다르고 주변 분위기도 달라서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입지문 왼쪽으로 보이는 곧게 뻗는 나무들.
    낮은 담장과 참 잘 어울린다.

    입지문을 내려와 마지막으로 신사임당 동상을 봤다.
    서 있는 율곡이이 동상과는 다르게 올곧게 앉아있는 모습이었는데, 표정에서도 인자함과 굳건함 보였다.

    사임당은 우리 역사에서 다시 찾을 수 없는 여성으로 부덕은 만인의 사표가 되었고 천부의 자질이 남달리 비범하여 여공은 말할 것도 없고, 글씨, 그림, 학문, 예술에 이르기까지 천재가 발휘된 작품과 업적이 오늘까지 남아 전하며, 뒷세상 사람의 우러름을 받고 있다.

    사임당은 율곡과 같은 거벽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매창과 옥산과 같은 자녀를 두었으니 이들은 다 어머니의 자질과 훈도에 연유하여 서예나 그림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남성은 서로 견주어지는 인물이 있으나 여성으로서는 사임당과 견줄 인물은 찾기 어려우니 사임당이 우리 민족의 만세의 여성상이라 이를 것이다.

    우리민족의 최고의 여성상이라 불릴만한 신사임당의 모습은 과히 오만권으로 얼굴을 빛내도 될 정도로 자랑스럽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사임당 동상을 끝으로 오죽헌에서의 일정이 끝났다.
    강릉의 명소인 오죽헌은 이번에 처음 가봤지만, 생각보다 분위기도 너무 좋고 볼 곳도 많아서 만족스러웠다.
    나중에는 조금 더 여유있게 가서 조금 더 많이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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